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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출근에 월급은 쌀 한 가마니, 조선시대 직장인의 하루

by 마리골드7188 2026. 8. 11.

이번 글에선 시선을 바꿔 조선시대 관리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작성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조선시대 관리를 떠올릴 때 보통 이런 장면을 상상합니다. 넓은 마루에 앉아 붓을 들고 시를 읊는 여유로운 선비. 그런데 실제 기록을 들춰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집니다. 그들은 해도 뜨기 전에 집을 나섰고, 월급날이면 쌀가마니를 지고 돌아왔으며, 그만두고 싶어도 사직서를 최소 세 번은 내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500년 전 한양의 출퇴근 풍경을 따라가 봅니다.

 

조선시대 직장인의 하루
조선시대 직장인의 하루

1. "묘시에 출근하고 유시에 퇴근하라" — 법전에 박혀 있던 근무시간

조선의 근무시간은 놀랍게도 법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관리가 묘시(卯時)에 출근해 유시(酉時)에 퇴근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묘시는 오전 5시에서 7시, 유시는 오후 5시에서 7시. 요즘 식으로 환산하면 새벽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열두 시간에 가까운 근무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조선에도 일종의 '동절기 단축근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에는 출근을 진시(오전 7~9시)로 늦추고 퇴근을 신시(오후 3~5시)로 앞당겼습니다.

전기가 없던 시대에 어두운 새벽길을 걷게 하는 것이 위험했고, 관청 안에서 문서를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근무시간이 계절을 따라 움직였다는 건, 조선의 노동이 철저히 해의 길이에 묶여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출근 관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관청에는 공좌부(公座簿)라는 장부가 있어 관리들이 출근하면 이름을 적었습니다. 요즘의 출퇴근 기록부인 셈인데, 이 기록이 단순한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일정 근무일수를 채우지 못하면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았고, 승진 심사에서도 근무일수가 근거 자료로 쓰였습니다. 지각과 결근을 감시하는 감찰 기구까지 따로 있었으니, 사헌부 관원의 눈을 피해 슬쩍 자리를 비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여기에 조회까지 더해집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조참(朝參)이나 상참(常參)이 있는 날이면 관리들은 평소보다 더 이른 시각에 궁궐 앞에 도착해 있어야 했습니다. 도성 문이 열리는 파루 종소리에 맞춰 어둑한 길을 걸어 출근하는 관리들의 행렬, 그것이 한양의 새벽 풍경이었습니다.

2. 월급날엔 광흥창으로 — 쌀과 콩으로 받던 봉급

조선 관리의 월급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쌀, 콩, 명주, 베 같은 현물이었죠. 이 녹봉을 지급하던 관청이 바로 광흥창(廣興倉)입니다. 지금 서울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의 그 이름이 여기서 왔습니다. 한강 물길로 전국의 세곡이 모여들던 자리에 창고를 두고, 그 곡식으로 관리들의 봉급을 준 것입니다.

지급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1년에 네 번, 계절마다 한 번씩 몰아서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분기별 지급인 셈인데, 문제는 물가였습니다. 곡식값이 오르내릴 때마다 실질 소득이 출렁였고, 봄에 받은 녹봉으로 여름을 버티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불편 때문에 조선 후기, 현종 대에 이르러 다달이 나누어 주는 월봉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조선의 '월급제 전환'이 17세기 후반의 일이었던 셈입니다.

액수는 품계에 따라 크게 갈렸습니다. 정1품 정승과 종9품 말단 관리 사이의 격차는 상당했고, 하급 관리의 녹봉은 식솔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생활하기에 넉넉하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녹봉 외에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를 함께 운영했습니다. 다만 이 토지 지급 제도는 시간이 흐르며 재정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축소되다가 결국 폐지되었고, 관리들의 살림살이는 더 팍팍해졌습니다.

흉년이 들면 사정은 더 나빠졌습니다. 나라 곳간이 비면 녹봉을 깎거나 아예 주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관직이 명예이면서 동시에 생계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생계가 그해 농사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의 감각으로는 꽤 낯설게 다가옵니다.

3. 유급 독서휴가와 사직서 세 번의 미학

그렇다고 조선의 직장생활이 고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봐도 부러운 제도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입니다. 세종이 젊고 유능한 집현전 학사들에게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책만 읽으라"며 내린 휴가입니다. 급여는 그대로 나오고, 업무는 면제되고, 할 일은 독서뿐. 요즘 말로 하면 완전한 유급 연구년입니다.

처음에는 집에서 읽게 했지만, 집에 있으면 손님이 찾아오고 집안일이 생겨 독서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한 절을 빌려 쓰다가, 성종 대에는 아예 전용 공간을 마련합니다. 그것이 독서당, 별칭으로 호당(湖堂)입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세워진 이 국가 공인 독서 공간에서 조선의 인재들이 길러졌습니다. 오늘날 서울 옥수동 일대에 남은 '독서당로'라는 도로명이 그 흔적입니다.

퇴사 문화도 독특했습니다. 조선의 관리는 사직서를 한 번 내고 끝내지 않았습니다. 세 번 사양한다는 삼사(三辭)의 예법에 따라, 왕이 반려하면 다시 올리고 또 반려하면 또 올리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정말 그만두고 싶어서 낸 사직상소도 있었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압박 수단이나 정치적 항의의 표현으로 쓰인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직서가 곧 협상 카드였던 셈입니다.

마치며

새벽에 출근해 어두워질 때 퇴근하고, 쌀로 월급을 받고, 그만두겠다는 말도 세 번을 반복해야 했던 사람들. 조선의 관리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유유자적한 선비보다는 오히려 지금의 직장인에 훨씬 가까웠습니다. 500년이 지나도 출근길의 무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오래 남는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